외동자녀 ·맞벌이 맞물려 계속 증가
방임 아동의 정신건강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한 부모 가정이나 조손 가정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던 아동방임이 최근 경제 불황으로 장시간 생계에 매달려야 하는 맞벌이 부부와 외동자녀의 급증과 맞물려 크게 늘면서 아이들이 속병을 앓고 있는 것. 부모가 다 있는 가정에서의 아동방임은, 특히 갈수록 늘어가는 사교육비 부담으로 많은 엄마들이 돈벌이에 뛰어드는 현상과 궤를 같이하며 되레 아이의 미래를 갉아먹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영재(가명, 9)의 경우도 그렇다. 영재 아빠는 건설회사에 다니고, 엄마는 영재의 어학연수 비용 등 미래에 대한 투자를 위해 영재가 일곱 살 되던 해부터 학습지 교사, 초등학생 과외 등의 일을 해왔다. 부모의 학력은 대졸, 두 사람 다 밤 9~10시는 돼야 귀가한다. 영재가 걱정되는 엄마는 저녁 무렵 항상 영재에게 전화해 저녁은 먹었는지, 학원은 잘 다녀왔는지 등의 안부를 확인한다. 그런데 두 달 전 부터 영재가 전화를 받지 않는 일이 잦아졌다.
"왜 전화를 받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준비물 사러 나갔다 왔다" "친구 집에서 놀았다"고 답하던 영재는 얼마 뒤부터는 더 자주 집을 비웠다. 이상히 여긴 엄마가 영재를 다그쳤고, 결국 "문구점 앞에서 전자오락을 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문구점 주인에게 직접 확인할 결과, 영재가 오랜 시간 자주 오락기 앞에 붙어 있으며, 한 번은 큰 아이들한테서 무언가를 요구받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아이들을 내쫓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주인이 영재에게 밤늦도록 집에 안 가는 이유를 묻자 "엄마한테 허락을 받아서 괜찮다"고 거짓말까지 한 사실을 알아냈다.
영재의 정서상태가 걱정된 엄만 소아정신과를 찾았고, 심리검사 결과 정상으로 나왔다. 영재의 행동에 대한 전문의의 임상적 판단은 '저녁시간대 방임에 의한 아동의 잘못된 대처전략 때문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영재는 왜 문구점 주변을 배회했을까. 전문의에게 털어놓은 영재의 답변이다.
"언제부턴가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서운 느낌이 들고,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해도 그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학원 차에서 내린 뒤 동에 아이들이 문구점 앞에서 오락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후 나도 자주 오락을 하게 됐고,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도 왠지 집에 가기 싫어 인근 놀이터에서 혼자 놀다 엄마가 올 시간쯤 집에 들어갔다. 엄마가 화를 내니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학원 차에서 내리면 나도 모르게 오락기 앞으로 달려가게 된다."
조인희 가천의해 길병원 소아 · 청소년정신과장에 따르면, 영재 또래의 아이가 밤늦도록 홀로 있는 것은 전형적인 아동방임이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영재의 행동이 비행이나 문제행동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2차로 정서적 문제가 발생하고 각종 범죄나 사고 위험에 노출될 수도 있으므로 반드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한다.
자기방어 능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방임 아동들 중 상당수가 혼자 있다가 성범죄와 유괴의 표적이 되거나, 화재 등 끔찍한 사고에 무방비로 당하는 비극은 언론 보도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심지어 개에게 물려죽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간과되고 있는 방임 아동의 또 다른 문제는 상처받은 정신건강이다. 조 과장은 "아이의 성격적 특성이나 가정 구조에 따라 아이가 다양한 문제들을 드러낼 수 있는데, 대체로 부모의 귀가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면서 불안해하는 강박 증적 불안, 분리불안장애, 원인을 알기 힘든 복통이나 두통, 어지럼증 들을 호소하는 신체형장애, 짜증과 공격성의 증가, 우울증, 비행행동 등을 보인다"고 말하면서 "식사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만성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려 위염이나 원형탈모증이 생기는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불안 ·초조 정신건강 위험수위
방임에 따른 문제 때문에 부모가 아이와 함께 정신과를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히려 반복적인 복통, 구토 등 원인을 찾기 힘든 통증 때문에 약물치료를 받고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는 어린이 환자들을 소아과 측에서 정신과에 진단을 의뢰하거나, 다른 문제로 정신과를 찾았다가 상담과정에서 방임 상태임이 드러나는 사례가 더 많다.
방임 아동에 대한 정신과 진료는 일반 진료와 다르지 않다. 상담을 통해 아이의 생각을 들은 뒤 나이와 상태에 따라 놀이치료나 상담치료를 시행한다. 초기에는 불안 ·우울 증상을 최대한 호전시키기 위해 약물치료를 병행하기도 한다. 증상이 빨리 사라지지 않으면 장기적은 등교 거부, 또래 관계나 일상생활아ㅔ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조 과장은 "그나마 병원을 찾는 부모들은 방임 문제를 어렴풋이나마 인지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라이어서 치료하면 아이의 상태가 대부분 좋아지다"면서도 "가족 내의 관계 갈등 또는 부모나 자녀의 개인적 인성 및 성격 장애가 심각한 경우엔 장기치료로 이행되거나 부모가 일방적으로 치료를 중단해 버리는 일도 있다"고 밝힌다.
아동발달 전문가인 유미숙 숙명여대 교수(아동복지학, 원광아동상담센터 소장_에 따르면, 방임에 가장 취약한 연령대는 초등학생이다. 이 시기는 아이들이 어른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면서 자기조절 및 욕구 지연 능력을 배워 깨치는 ㄴ중요한 때인데, 방임될 경우 그러한 능력이 길러지지 않아 향후 대인관계 형성에 문제를 일으킬 위험성이 크다는 것. 유 교수는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가 5새를 넘어서면 자기통제력을 갖게 된다고 여기지만, 이는 그들만의 과잉기대'라면서 "자기 통제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자칫 타인에게 충동적 욕구를 발산하거나, 미국 버지니아공태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씨처럼 자기만의 공상세계에 빠질 우려가 높다"고 지적한다.
주간동아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